경험이란 무엇일까요?
경험의 정의에 대해 Gemini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네요.
경험이란 개인이 실제로 겪어나 해본 일,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이나 기능, 혹은 그런 과정에서 인지하고 깨달은 모든 내용을 의미합니다.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경험이란 도구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의 틀과 형태가 바뀐다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바뀌지 않을까요? 지금껏 우리가 겪은 경험의 과정들이 기술로 인해 다른 무언가로 대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술이 우리를 발전시키고 성장시킬 동인이 되기도 하지만 기술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없는지 한번 돌이켜 보는 시간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 The Extinction of Experience> 란 책은 말 그대로 경험의 멸종에 대한 책입니다.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에 우리는 인간다움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경험의 기억들을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는 책입니다. 그럼 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볼까요?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한다고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특정 유형의 경험들이 우리의 삶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기술들이 우리와 세상 사이에서 매개체로서 둘 사이를 맺어주는 중간 역할을 하면서 우리가 세상과 직접 대면하는 경험의 기회들이 점차 없어지고 있습니다.
굳이 사람 간의 상호 작용을 개선하지 않고도 새롭고 편리한 경험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게 되면서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명확성과 일관성이 사라졌다.
<경험의 멸종> 중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경험은 누군가와의 직접적인 대면입니다.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개인에 대한 이해의 확장은 우리의 사회성을 구축하는데 핵심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직접 대면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폭을 넓혀 왔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또 스마트폰을 통한 소셜 네트워크 플랫폼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서 누군가와의 직접적인 경험의 가치가 점점 옅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것도 중요한 대화의 수단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실적으로 직접적인 만남과 미팅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닐테니까요. 먼거리에 있을 경우, 이런 간접적인 만남과 소통은 유대관계를 확장시키는 훌륭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기술이 소통의 통로와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술은 서서히 우리의 생각와 인식, 그리고 행동의 패턴을 변화시켜 갑니다. 편리한 간접 소통은 직접 소통의 의미를 퇴색하게 만들죠. “꼭 만나야 하는 걸까? 시간도 많이 들고 돈도 들고 에너지도 많이 소모되고. 그냥 전화나 카톡, 그리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얘기하면 되는거지 뭐.”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고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지는 순간 우리에게 중요한 만남의 경험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의 두께라 달라지고 필터가 씌여집니다. 이런 결과를 기술의 혜택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부재의 현존’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부재의 현존 : 물리적으로는 공간에 존재하지만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는 그 공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
식당에 가면 젊은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열이면 일곱, 여덟은 식사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를 줍니다. 아이들은 작은 모니터에서 나오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몰두하죠. 여기에 집중하느라 아이들은 부모에게 칭얼대지 않고, 조용히 스크린만 바라봅니다. 육아는 참 힘들죠. 그러니 밖에서 식사하는 순간만큼은 좀 편하게 식사하고 싶다는 심정이야 왜 이해를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가족과 함께 식사한다는 경험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함께 있어도 따로 있는 가족이 되는 거죠.
이번 주 토요일에도 한 식당에서 아내와 점심을 먹는데, 옆 가족 (부모님과 20대 초반의 아들)이 정말 단 한 마디도 없이 식사를 하더라구요. 아들은 오로지 스마트폰만 보고 있구요. 함께 점심을 나누고 있지만,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느낄 수 있을까요? 스마트폰이 없었던 세상은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기술은 우리의 대화법을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기술은 우리를 끊이지 않는 연결상태로 만들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혼자 있지만, 한시도 홀로 있지 않고 누군가와 끊임없이 소통합니다. 기술은 우리는 소통의 전문가로 만들어주는 듯 하지만 정작 집중해야할 바로 지금에 오롯이 포커스하는 능력은 점차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마이클 이스터의 <편안함의 습격>에서 집중에 대한 2가지 모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집중 모드와 비집중 모드인데요. 집중의 힘을 키우기 위해 오히려 비집중 모드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집중 모드는 마음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다. 한편 비집중 모드는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일어난다. 내면을 향하는 마음의 방황이자 휴식 상태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어떤 일을 더 훌륭하게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집중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복원하고 구축한다.
<편안함의 습격> 중에서
우리의 손에서 스마트폰이 떨어지지 않는 한, 우리 내면의 비집중 모드는 절대로 활성화되지 않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기술은 우리에게서 앗아가 버린 게 아닌지 슬퍼질 때가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꺼두는 오프의 시간을 강제적으로나마 가질 수 있는 의지가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술에 대한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술로 인한 변화는 우리의 삶을 더 진보시키고 개선시키는 것이다 라는 믿음은 요즘은 마치 신앙과도 같이 우리에게 펴져 있습니다. 기술은 우리의 능력을 더욱 강화시키고 줄 것이란 생각,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사실입니다. AI는 우리가 전에 없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효율성을 뽑아낼 수 있는 환경을 기술이 만들어주고 있죠. 개인과 기업의 능력이 향상되는 부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로 인해 잃어버린 우리의 능력은 없을까요?
사실 네비게이션이 등장하기 전에 우리는 모두 네비게이션을 머리 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냥 알게 되는 방향감각입니다. 오롯이 자신의 감에 의지해서 이 길로 가면 될 것 같은 그 느낌으로 처음 가는 길을 찾아 냈습니다. 교통 상황들도 경험에 의해 인지하고 보다 효율적인 길을 머리 속에서 순간적으로 찾아냅니다. 그런 능력이 운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알던 길도 가기 두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항상 가는 길인데 왠지 네비게이션이 꺼져 있으면 불안합니다. 혹시 과속 카메라를 모르고 지나가게 되는 건 아닐까? 혹시 가던 이 길이 갑작스런 일로 인해 정체가 일어나진 않을까? 내가 지금 생각하는 그 길이 진짜 맞나? 이런 불안한 마음이 계속 생겨납니다. 우리 머리 속의 GPS는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길찾기 능력이 현저히 줄어들었거나 혹 사라지게 된 겁니다.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길찾기 능력은 제한되고 불확실한 부분이었어. 그러니 GPS 기술과 첨단 AI 경로 최적화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최신 네비게이션에 의존하는 게 절대 나쁜 것이 아니야”라고 말이죠. 그렇죠, 이게 바로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경험의 멸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능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인간다움을 약화시킨다.
<경험의 멸종> 중에서
경험은 불완전함 그대로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불완전한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점차 나아지도록 개선하려는 노력이 우리의 경험과 능력을 강화시키고 더 풍성하고 촘촘한 인생의 결을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혹시 우리는 그 여정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디 길찾기 능력만 해당하는 건가요? 기억하는 능력, 집중하는 능력도 기술의 도움으로 점차 퇴색되어 가는 인간의 능력들 중 하나입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면 점차 소멸되어가는 우리의 능력들을 조금은 회복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무엇을 인간다움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는 사람다 의견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변화 속에서도 코어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은 반드시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경험의 멸종>에서 크리스틴 로젠은 이렇게 말하고 있죠.
우리에겐 새로운 인본주의가 필요하다. 인간 경험을 중심에 둔 인본주의 말이다… (중략)..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딱 떨어지지 않는 경험의 조각들’ 이다.
<경험의 멸종> 중에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경험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런 사소한 것들이 생각납니다.
- zoom 으로 하는 미팅 말고, 실제 얼굴을 직접 맞대면서 회의하기
- 컴퓨터나 스마트폰에만 메모하는 것 말고, 직접 종이에 손으로 써서 메모하기
- 버스를 기다릴 때,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기
-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져나와 책을 펴기
- 책상 앞에 앉아 있기 보다는 밖으로 나가 산책하기
- 여행 유튜브만 보기 보다는 가까운 곳이라도 직접 여행가기
- 가끔은 네비게이션을 끄고 운전해 보기
- 운전보다는 가까운 곳을 걸어서 이동하기
- 음악을 듣기 보다는 그냥 주변의 소리를 듣기
아마도 저마다의 소소한 경험의 흔적들이 생각이 나실 겁니다. 내가 잃어버리고 있던 경험의 편린들을 조금씩 회복하는 노력은 기술의 시대에 점점 소중해지고 있습니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양면적인 속성이 있죠. 분명히 긍정적인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악용의 우려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오늘의 이야기 속에 잊지 말아야할 부분입니다.
기술은 해방의 도구이자 억압의 도구다
<경험의 멸종> 중에서
그래서 새로운 기술, 새로운 도구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에 대한 막연한 환상 혹은 개선된 기술은 진보와 동일시하려는 생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지 말 것인지는 오로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요즘의 기술의 발전 속도를 보면 멍해질 때가 많습니다. 너무 빨라서 따라가기 벅찹니다. 어느 순간 자신이 뒤쳐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술의 수용은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 만의 속도를 가지고 내가 잃어버리지 말아야할 것들을 조금은 욕심을 내서 고집스럽게 간직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기술의 속도가 빨라지고; 지식이 보편화되는 시대에 오히려 자신만의 관점의 존재 유무가 경쟁력을 가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컴퓨터의 메모앱에 빽빽히 써넣은 지식들보다 종이 메모지에 갈겨 쓴 한 줄 내 생각의 편린이 어쩌면 더 큰 가치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속도만이 답이 아닙니다.
촌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