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성을 찬양하라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분야가 업무 효율에 대한 겁니다. 혼자서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떻게든 일과 시간을 쪼개서 최대한 효율성 있게 일을 하려 노력합니다. 최근에는 여러 업무들을 5분 단위, 10분 단위, 30분 단위로 나눠서 일의 분량과 중요성에 따라 진행할 수 있는 나름의 프로세스를 만들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2~3분짜리로도 업무롤 세분화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이 익숙해지면 정말로 꽤나 많은 일들을 짧은 시간에 해낼 수 있습니다. 업무 효율의 극대화를 이뤄냈다고나 할가요? 진짜로 하루 동안 처리한 일들의 목록을 보면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효율성을 추구하며 실제 실천하는 게 만만치는 않습니다. 의지력도 필요하지만, 스스로를 마이크로 콘트롤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료된 수많은 체크리스트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래 오늘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해냈구나. 대단하다. 스스로 이렇게 대견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뭔가 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성과가 예전같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데, 뭔가 모를 허망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할까요? 답답한 뭔가가 올라오는 겁니다. 명확히 그게 뭔지는 알기 어려웠어요. 수많은 ToDo List를 챙겨가면서 처리해 나가고 있는데, 어디서부터인가 막혀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효율도 예전같지 않은 시간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지? 시간 배분이 잘못 되었나? 우선 순위의 문제인가? 목표가 명확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되나?
이런 고민으로 일상의 권태기에 빠져 있는 가운데,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읽게 되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전기작가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이기도 한데요.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광기와 우연의 역사> 등을 썼고, 예전에 <수요레터>에서도 그의 책을 소개해 드린 적도 있습니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는 그의 사후에 알려진 미공개 에세이들을 모아서 출간한 책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광기를 피해서 브라질로 망명을 떠나서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기 전까지 남겼던 글들입니다. 가장 어둡과 야만적이었던 시절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 살아갈 용기, 불의에 저항하는 힘에 대한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소설과 글로 남겼던 그는 이 책을 통해서도 지식인의 양심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 에세이 중에서 ‘영원한 교훈’ 이라는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츠바이크가 25살이던 젊은 시절, 나름대로 여러 글들을 발표하면서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에 대해 큰 자신감은 없었습니다. 스스로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츠바이크는 파리에서 동료 작가들, 선배 작가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요. 한 모임에서 르네상스 이후의 조형 미술의 쇠퇴에 대해서 토론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츠바이크는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했던 조각가 로댕의 위대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 조형 미술은 죽지 않았다고 주장했었다고 해요. 그의 주장을 들은 선배 시인 베르하렌은 자신이 곧 로댕의 작업실에 갈 예정인데, 그렇게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같이 동행해서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츠바이크는 너무 놀라워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죠.
츠바이크는 설레임과 기대감을 가지고 로댕의 작업실로 향했습니다. 선배 시인의 소개로 로댕의 작업실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너무도 존경했던 거장과의 만남에 주눅들어 츠바이크는 실제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로댕은 츠바이크의 이런 겸손함을 좋게 보았던지, 시간이 괜찮으면 일요일에 자신의 집에 와서 함께 저녁을 먹자며 초대를 했습니다. 갑작스런 초대에 당황하긴 했지만, 츠바이크는 당연히 그의 초대에 응했죠.
소박한 로댕의 집에 방문한 츠바이크는 그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식사 후 두 사람은 로댕의 넓은 작업실로 가게 되었습니다. 작업실에는 여러 미완성 작품들과 완성된 작품들이 많았는데, 로댕은 헝겊에 싸여 있는 어떤 여성 조각상을 보여주면서 이제 막 완성한 작품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로댕은 자신의 완성된 작품을 잠시 보더니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습니다. 로댕은 곁에 있던 츠바이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딱 저기 어깨선만, 저기만 너무 거칠어 보이는군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조소 주걱을 집어 들었다. 주걱으로 부드러운 점토 위를 가볍게 쓸어내려 피부에 은은한 윤기를 더했다. 그의 두툼한 양손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민첩해졌고, 그의 두 눈은 불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그리고 여기도”
그는 계속 고치고 다듬어 나갔다. 그는 다시 고치고, 가까이에서 보고, 물러나서 확인하고, 작업대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목에서 꿀꺽대는 이상한 소리가 났고, 이내 눈빛이 빛났고, 다시 화를 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점토 한 줌을 반족하여 작품에 덧입히고 거기서 다시 조금씩 긁어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작업을 시작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30분, 한 시간, 한 시간 반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었고, 나는 그런 모습에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았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중에서
로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옆에 누가 있는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완성했다고 생각했던 그 작품에서 무언가 불완전함을 발견하였고, 그로써는 지금 당장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로댕의 모습에 츠바이크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한 시간에 나는 세상의 모든 예술과 성과의 궁극적 비밀을 확실히 이해했다. 그것은 바로 집중력이었다. (중략) 나는 지금까지 내게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완벽을 향한 의지로 모든 것을 잊는 열정! 크든 작든 자기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중에서
츠바이크의 깨달음은 저에게도 와 닿았습니다. 일의 효율성을 높힌다는 것이 자칫 얼마나 피상적일 수 있는지를 이 일화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다양한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관리하고 최적화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일의 완성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죠. 효율적인 작업을 위한 그간의 많은 노력들의 한켠에선 왜 그렇게 헛헛한 느낌이 들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효율이라는 허울 속에서 헤매어 왔다는 것, 그리고 작업에 대한 본질을 제가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었습니다. 어떤 일은 시간의 효율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의 완성도를 위해 오롯이 집중하고 몰입해야 합니다. 어떤 단계와 성과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집중과 몰입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츠바이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작업실에 머물렀던 그 한 시간에 나는 학교에서 여려 해 동안 배웠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중략) 자기 자신과 모든 목표 및 목적을 완전히 잊고, 오직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 목표인 완벽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중에서
로댕은 작업을 마치고 나서, 한 시간 반 내내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츠바이크를 발견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지 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 보았죠. 그 때 그는 자신이 작업에 몰두한 나머지 손님을 이대로 방치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 로댕을 보며 츠바이크는 그의 손을 덥석 잡습니다.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준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젊은 작가의 마음을 읽은 로댕은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싸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AI로 무장한 수많은 업무 툴들은 우리의 업무 능력을 고도화시키고 효율화시키는 데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도구들을 사용하면서 그동안 혼자서는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을 처리해 내는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바라보기도 하죠.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없이 많은 업무들을 처리해야하는 필요성 때문에라도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살아보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 자리잡은 어떤 헛헛한 느낌의 원인을 츠바이크의 작은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 찜찜함의 이유를 말이죠. 어떤 놀라운 성과는 비효율성을 통해야만 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동안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가치 있고 의미있는 일들은 ToDo List를 제거해 나가는 업무 효율성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얘기했던 바로 그 ‘집중 flow’ 의 과정을 통해 성취되는 불꽃같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거다 싶은 것은 시간의 제약이나 우선순위를 고려하지 않고, 어쩌면 주위의 시선마저도 생각하지 말고 그 일에 달려들어야 하는 것인가 봅니다. 그런 약간의 무례함과 비효율성에 의지해서 달성할 수 있는 그것. 집중력! 그것이야 말로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는 열쇠입니다.
이렇게 속으로 다짐해 봅니다.
“비효율성을 찬양하라”
촌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