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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레터 208회]
변화의 키워드, 돈오점수(頓悟漸修)
안녕하세요, 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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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을 꿈꾸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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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치는 깨달음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거나, 책 한 권을 읽고 사람이 180도 달라지기를 기대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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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절대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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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장 등록을 결심했던(깨달음) 1월 1일의 열정은 2월이 되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이제부터 긍정적으로 살겠다"는 다짐은 사소한 말다툼 한 번에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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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고서, "그래, 이제 SNS는 다 끊어버리고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을 거야" 라고 결심을 해도, 금새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쇼츠를 스크롤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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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우리의 깨달음은 삶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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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전, 고려의 승려 보조국사 지눌(知訥)은 이 물음에 대해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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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점수(頓悟漸修), 제가 좋아하는 문구이기도 하죠.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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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 불교계는 혼란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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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교종과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이 대립했고, 승려들은 권력과 결탁해 타락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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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지눌은 한번에 깨닫고(돈오頓悟), 점진적으로 닦는다(점수漸修)는 수행론을 주창하며 불교계를 정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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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은 우리의 마음을 '얼음과 물'에 비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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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의 본질이 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돈오(頓悟)입니다. "아, 내가 본래 부처구나!",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구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니라 찰나의 통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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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질을 알았다고 해서 꽁꽁 언 얼음이 당장 흐르는 물이 되어 갈증을 씻어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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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실제로 물이 되기 위해서는 따뜻한 볕을 쬐며 녹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점수(漸修)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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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오랫동안 쌓여온 나쁜 습관, 즉 습기(習氣)를 닦아내고 깨달음을 현실로 구현해 나가는 끈질긴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대인의 자기계발: '유레카'와 '루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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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래된 수행론은 오늘날 자기계발의 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맥이 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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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돈오(頓悟)'는 '각성'의 순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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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살 수는 없다"는 자각, 자신의 꿈을 발견한 순간, 혹은 비효율적인 업무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한 순간이 바로 현대판 돈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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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우리는 엄청난 고양감과 함께 미래가 바뀔 것이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짜릿한 감격이 몰려오고, 자존감은 한껏 고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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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돈오' 각성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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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깨달음의 짜릿함에 취해, 그것이 곧 성취라고 착각합니다. 어제까지 게으르던 사람이 오늘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내일 당장 부지런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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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뇌와 신체에는 수십 년간 축적된 '관성'이라는 두꺼운 얼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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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필요한 것이 현대인의 '점수(漸修)', 바로 '습관 형성'과 '꾸준한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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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전 지눌의 '점수'는 현대판 '루틴'에 다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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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가 '방향'을 잡는 나침반이라면, 점수는 그 길을 걸어가는 '두 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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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가 자기계발서의 '첫 장'이라면, 점수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연습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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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를 예로 들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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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위해 살을 빼야겠다"는 자각(돈오)은 누구나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몸을 바꾸는 것은 매일 아침 운동화를 신는 귀찮음을 이겨내는 점수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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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돈오)은 쉽지만, 매일 단어장을 펴는 행위(점수)는 고통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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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례는 수 백개라도 들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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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은 깨달음 이후에도 수행을 멈추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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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언어로 바꾸자면, "동기부여는 시작을 돕지만, 습관만이 당신을 계속하게 만든다"는 짐 론(Jim Rohn)의 명언과 일맥상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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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깨달음의 부족이 아니라, 지루한 훈습(薰習)을 견디지 못해 실패하곤 합니다.
점수(漸修), 가장 숭고한 지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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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점수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위로는 "변화는 더딜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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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결심하고 내일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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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깨달음이 거짓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얼음을 녹일 열기가 충분히 쌓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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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점수)은 한순간의 폭발적인 힘이 아니라, 빗방울이 바위를 뚫듯 꾸준한 반복을 통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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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오늘 느낀 성장의 필요성이 '돈오'라면, 내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그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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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며, 때로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 반복들이야말로 당신의 깨달음을 진짜 '당신'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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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루함이 바로 진정한 변화의 정수입니다.
오늘도 돈오점수(頓悟漸修) 하시길 ~
촌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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